[복지동향] ‘나는 괜찮다’는 말 뒤, 숨은 트라우마를 보듬는 사람들

작성자
노원 복지샘
작성일
2022-11-21 14:31
조회
3100

[출처] 경향신문

[원문보기] https://www.khan.co.kr/national/national-general/article/202211211046001






국혜조 한국소매틱심리연구소장은 지난달 29일 핼러윈 열기로 가득했던 이태원에 다녀올 생각이었다. 누리꾼들이 직접 올리는 생중계 영상을 보다 마음을 접었다. 사람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안 가길 잘했다. 재미있겠네’라는 생각을 하며 영상을 보고 있는데 “심각한 일이 벌어진 것 같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날, 많은 이가 그랬던 것처럼 ‘별일 아니겠지’ 생각했고 일찍 잠들었다. 다음날 아침 외국 친구들로부터 e메일이 쏟아졌다. 참사가 벌어진 걸 알게 된 건 그때였다.


이태원 참사로 심리적 어려움을 겪는 이들의 상담을 담당하는 트라우마 치유센터 사람마음의 김자강·국혜조 심리상담사가 9일 서울 마포구 상담센터에서 경향신문과 인터뷰에 앞서 사진촬영을 하고 있다. 문재원 기자

이태원 참사로 심리적 어려움을 겪는 이들의 상담을 담당하는 트라우마 치유센터 사람마음의 김자강·국혜조 심리상담사가 9일 서울 마포구 상담센터에서 경향신문과 인터뷰에 앞서 사진촬영을 하고 있다. 문재원 기자



트라우마 심리상담 전문가인 국 소장은 전 국민의 정신건강을 위협하는 응급상황이라는 것을 직감하고 동료들을 찾았다. 한국심리학회 등 여러 학회에서도 참사 피해자들을 위한 무료 심리상담을 진행하기 위해 전문가 자원봉사단을 모았다.

함께 나선 이들 중에는 한국심리학회 소속 김지강 상담심리사(트라우마치유센터 사람마음 심리복지위원장)도 있었다. 김 상담심리사도 참사 전날 늦은 밤, 뉴스를 통해 이태원에서 사상자가 나오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얼마나 큰 사고가 벌어진 것인지는 이튿날이 돼서야 알았다.

두 사람은 가정폭력·성폭력·국가폭력·학교폭력 등의 생존자나 재난 상황을 겪은 이들이 트라우마에서 회복될 수 있도록 상담하는 일을 전문적으로 해왔다. 트라우마를 겪은 이들이 어떤 반응을 보이고 어떻게 회복해가야 하는지 잘 알고 있다. 이들이 보기에 이번 참사의 영향은 광범위했고, 빠른 조치가 필요했다. 지난 9일 서울 마포구 한국소매틱심리연구소에서 두 사람을 만났다.



“나는 괜찮아”라고 하지만…



국 소장은 참사 현장에 있었던 피해자 2명의 심리상담을 하고 있다.

“저는 괜찮은데 주변에서 상담을 받아보라고 해요.”

상담을 받으려고 온 이들 중 여럿은 이 말로 상담을 시작한다. 이번 참사를 포함해 각종 재난 상황을 겪은 피해자 중에는 “나는 괜찮다. 아무렇지도 않다”는 반응을 먼저 보이는 경우가 많다. 국 소장은 “이런 분들도 상담을 통해 아무렇지 않았던 게 아니라, 트라우마로 인한 상처를 제대로 느낄 수 없던 상태라는 걸 알게 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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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라우마는 ‘정신적 외상(충격)’을 가리킨다. 한국트라우마스트레스학회에선 트라우마를 겪은 재난 경험자를 5단계로 분류한다. 직접적 충격을 입은 사람(1차)부터 각종 미디어를 통해 간접적으로 심리적 스트레스를 겪는 사람(5차)까지 폭넓다. 이태원 참사를 직간접적으로 접한 전 국민 대부분이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트라우마를 경험했다는 얘기다.

트라우마를 회복하지 못하면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로 이어질 수 있다. 김 상담심리사는 “외상에 대한 재경험과 회피, 인지와 기분의 부정적 변화, 각성조절의 어려움과 신체 기능저하는 물론 장기화되는 경우 광범위한 자기 조절 장해로 이어져 치료가 어려워질 수 있다”고 설명했다.

트라우마 경험은 시간이 지나며 완화되고 애도의 과정을 거쳐 개인의 성장으로 이어질 수도 있지만, PTSD 및 다른 신체적·심리적 질병으로 발전할 수 있다. 트라우마를 경험했다면 적절한 도움을 받아 잘 치유되고 있는지를 확인하는 것도 중요하다.


이태원 참사로 심리적 어려움을 겪는 이들의 상담을 담당하는 트라우마 치유센터 사람마음의 국혜조 심리상담사가 9일 서울 마포구 상담센터에서 경향신문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문재원 기자

이태원 참사로 심리적 어려움을 겪는 이들의 상담을 담당하는 트라우마 치유센터 사람마음의 국혜조 심리상담사가 9일 서울 마포구 상담센터에서 경향신문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문재원 기자



국 소장에 따르면 많은 이들이 참사 직후 자신의 상태를 자각하기 힘든 일종의 ‘쇼크(충격) 상태’에 빠진다. 국 소장은 “생존을 위협하는 재난 상황을 겪으면 자연스럽게 충격을 잊기 위해 뇌의 기능이 감소하게 된다. 기억력이 저하되기도 하는데, 이때 잠이 오지 않고, 소화가 안 되는 등 다양한 신체 반응도 나타난다. 평소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느끼고, 얼마나 큰 충격을 받았는지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참사 초기에는 ‘나는 괜찮다’는 반응이 나오기도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국 소장은 이런 충격 상태로부터 안정적으로 벗어난 뒤라야 어떤 트라우마를 겪었고 나의 상태가 어떤지 자각하면서 마음이 치유되기 시작한다고 설명했다.

참사를 직접 현장에서 겪은 이들뿐 아니라 SNS를 통해 현장 영상을 본 이들도 트라우마를 느낄 수 있다. 국 소장은 “참사를 다룬 미디어에 지속적으로 노출되는 것도 트라우마가 되고, PTSD로 이어질 수 있다”고 말했다.


9일 서울 용산구 이태원역 1번 출구에 마련된 ‘이태원 핼러윈 참사’ 추모공간에 시민들이 놓은 추모 꽃다발이 쌓여 있다. 성동훈 기자

9일 서울 용산구 이태원역 1번 출구에 마련된 ‘이태원 핼러윈 참사’ 추모공간에 시민들이 놓은 추모 꽃다발이 쌓여 있다. 성동훈 기자



최근 참사 피해자 1명과 상담을 시작한 김 상담심리사도 트라우마를 겪은 피해자들이 보이는 다양한 반응에 주목했다. 그는 참사 자체에 무관심해하거나 다른 피해자들을 비난하는 모습도 “생명의 위협을 감지하는 순간 인간이 포유류로서 보일 수 있는 본능적인 반응”이라고 했다. 참사와 심리적으로 거리를 둬 안정을 찾으려는 반응이다.

정신적 충격을 받았다며 극도의 공포감을 느껴 눈물을 흘리는 등의 모습도 있지만, 충격 직후에는 ‘무감각’해지는 경우도 많다. 각종 폭력과 사고의 피해자들이 피해 직후에는 아무렇지 않은 듯 보이다 시간이 한참 지나 비로소 고통을 느끼거나 힘들어하는 것도 같은 원리다.

이 밖에도 소화불량, 두통, 구토, 배탈, 설사 등과 같은 신체적 반응이나 무관심, 무감정, 격정적인 감정 변화 등 정신적인 반응 등이 트라우마의 증상으로 나타난다. 국 소장은 “사람마다 트라우마에 대한 반응과 회복할 수 있는 능력이 다르기 때문에 전문가에게 상담을 받고 자신의 상태를 확인해 보는 것이 좋다”고 말했다.



트라우마는 사회적인 고통



다양한 트라우마 상담을 경험한 김 상담심리사는 “트라우마는 사회적인 고통”이라고 했다. 특히 대형 재난이나 참사는 사회적으로 광범위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개개인이 스스로 트라우마에서 회복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김 상담심리사는 “참사 피해자와 유족들을 치료하고 돕기 위해서라도 사회의 구성원들이 서로 돕고 도움을 받아야 한다”고 말했다.

재난은 경중을 비교할 수 없지만, 전 국민이 트라우마를 겪었던 세월호 참사와 이번 참사 사이에 다른 점도 발견된다. 이태원 참사는 누구나 접근할 수 있던 익숙한 시간과 장소에서 많은 시민들이 목격하는 가운데 벌어졌다는 점이다. 참사 장면이 담긴 영상이 여과 없이 온라인에 퍼지기도 했다.

피해자와 유족들은 물론 참사를 접한 수많은 시민들이 ‘나도 겪을 수 있던 일’이라고 여겨 정서적인 충격을 크게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계속 참사 내용을 접하는 것은 트라우마 회복에 나쁜 영향을 미칠 수 있다. 국 소장은 “재난을 접하면 정신적 충격을 받아 기억력 등 뇌 기능이 순간 떨어지게 되는데, 언론 보도나 관련 영상을 보게 되면 새롭게 기억이 활성화돼 트라우마를 다시 경험하게 된다”고 말했다.


이태원 참사로 심리적 어려움을 겪는 이들의 상담을 담당하는 트라우마 치유센터 사람마음의 김자강 심리상담사가 9일 서울 마포구 상담센터에서 경향신문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문재원 기자

이태원 참사로 심리적 어려움을 겪는 이들의 상담을 담당하는 트라우마 치유센터 사람마음의 김자강 심리상담사가 9일 서울 마포구 상담센터에서 경향신문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문재원 기자



김 상담심리사는 10대 때 세월호 참사를 겪고 20대가 돼 이태원에서 참사를 겪게 된 세대들은 누적된 트라우마의 영향으로 심리적 영향을 더 크게 받게 될 우려도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트라우마 회복을 위해서는 안전한 사회를 만들어가는 것이 먼저”라며 “재난 트라우마를 회복하기 위해 중요한 것은 트라우마로 인한 생존자의 경험과 피해를 사회에서 인정하고 충분히 지원해주는 것과, 진상규명을 위한 노력과 후속조치에 따른 책임이 함께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다.



지금 여기, 신체 감각에 집중하기



국 소장은 생리적 스트레스 반응을 안정화하고 위기를 극복하는 회복 탄력성을 키우는 데 도움을 주기 위해 만들어진 ‘스코프(SCOPE)’를 소개했다. 재난 상황을 직간접적으로 겪은 이들을 위해 만들어진 위기 안정화와 안전 지원을 위한 매뉴얼로 해외에서 널리 쓰인다.

트라우마를 겪게 되면 정신적 반응이 둔화하고 무의식적으로 다양한 신체적 반응이 나타나는 것에서 힌트를 얻어 만들어졌다. 각종 트라우마를 접하면 호흡이 얕아지고, 심박수가 증가하며 무감각해지는 등 생리적 스트레스 반응이 나타난다. 이를 안정화해 위기를 극복할 수 있도록 회복력을 키워주는 방법이다.

예를 들면 발의 감각에 집중해 아주 천천히 10걸음을 걷거나,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며 유쾌하고 위안이 되는 곳에 시선을 두고 색깔과 모양을 관찰하며 ‘시각적 휴가’를 즐기는 방법 등이다. 국 소장은 “트라우마로 인한 충격 상태에서 신체의 기능을 회복하면서 자연스럽게 신체의 회복력을 촉진해 트라우마가 PTSD로 이어지지 않도록 돕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생리적 스트레스 반응을 안정화하고 위기를 극복하는 회복탄력성을 만드는 데 도움이 되는 5가지 방법. 앞 글자를 따 ‘SCOPE 매뉴얼’이라고 불린다. 한국소매틱심리연구소 제공

SCOPE 메뉴얼

생리적 스트레스 반응을 안정화하고 위기를 극복하는 회복탄력성을 만드는 데 도움이 되는 5가지 방법. 앞 글자를 따 ‘SCOPE 매뉴얼’이라고 불린다. 한국소매틱심리연구소 제공



참사 영상을 보게 돼 트라우마를 겪은 이들이 있다면, 영상의 잔상에서 벗어나 ‘내가 지금 여기에 있다’는 신체 감각에 집중하는 방법이 도움이 될 것이라고 했다. 머릿속에서 영상을 다시 떠올리지 않으려고 노력하기보다, 지금 내가 살아가고 있는 현재의 순간에 느껴지는 몸의 감각에 집중하라는 의미다.

이런 개인적인 노력 외에도 사회 전체가 트라우마 회복을 위해 함께 노력해야 한다고 이들은 주문했다. 광범위한 피해자들을 치유하기 위해 정부 차원에서 트라우마 대처를 위한 컨트롤타워가 제대로 작동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또 사회 구성원 모두가 피해자들을 대하는 태도도 중요하다고 했다.

참사를 겪은 이들 중 “죄책감이 느껴지지 않아 죄책감이 든다”는 이들도 있다고 했다. 김 상담심리사는 “ ‘생존자라면 마땅히 이래야 한다’고 생각한 모습과 자신이 다를 때 혼란스러움과 죄책감을 느끼기도 한다. 하지만 트라우마를 경험하는 개인의 경험은 저마다 다를 수 있기 때문에 판단과 평가 없이 다양한 경험과 반응을 존중하고 수용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또 “참사를 겪은 외국인 등 다양한 이들이 소외되지 않도록 사각지대 없이 지원하고, 트라우마에서 회복될 수 있도록 조력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한 시민이 9일 이태원역 1번 출구 계단을 오르고 있다. 성동훈 기자

한 시민이 9일 이태원역 1번 출구 계단을 오르고 있다. 성동훈 기자



국 소장은 “재난과 참사의 상황에 어떻게 대처하느냐가 다양성을 수용하는 성숙한 사회로 나아가고 있는지를 보여준다고 생각한다”며 “같은 참사를 겪어도 사람마다 다른 반응을 보인다. 누군가는 슬퍼하지만 어떤 이는 슬퍼하지 않는 모습도 보인다. 충격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한 이들이 쉽게 보일 수 있는 반응이다. 트라우마를 겪고 있어서 나타나는 모습인데, 여기서 제대로 회복한 뒤에야 진정한 애도로 나아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는 또 “참사를 겪게 되면 트라우마가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두려움을 느끼곤 하는데, 우리 몸의 지혜는 우리를 계속해서 회복시키는 여정으로 초대한다”며 “트라우마에서 회복될 수 있다는 믿음을 우리 사회가 가졌으면 좋겠다. 도움이 필요하면 도움을 주고받으면서 서로 믿는 공동체가 되어 회복해갔으면 좋겠다”고 했다.

전현진 기자 jjin23@khan.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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