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한겨레신문
[원문바로보기] https://www.hani.co.kr/arti/opinion/column/996032.html
한채윤 한국성적소수자문화인권센터 활동가
두명의 여고 동창생이 있었다. 둘은 여고를 졸업한 후부터 함께 지냈다. 한 사람은 직장을 다녔고 또 한 사람은 집안 살림을 맡았다. 그렇게 40여년을 보내며 60대에 접어들었는데 한쪽이 병으로 쓰러졌다. 간병을 열심히 했지만 큰 수술에는 혈연 가족의 동의가 필요했다. 평소 왕래가 없던 먼 친척이 나타났고, 동시에 아픈 분의 아파트, 보험, 예금 등의 권리도 그 친척의 몫이 되었다. 자신이 살던 집에서 계속 살려면 갑자기 나타난 친척의 허락을 받아야 하는 기막힌 처지가 된 것이다. 삶의 터전을 지키려 싸웠지만, 도리어 받게 된 법적 처분은 집에도, 병원에도 오지 말라는 접근 금지였다. 결국 40년을 함께한 이의 임종도 지켜볼 수 없는 슬픔 속에서 그분은 스스로 삶을 마감했다. 2013년에 있었던 일이다.
이런 사례만 있는 건 아니다. 50대의 레즈비언 커플 중 주택 명의를 가진 파트너가 세상을 떠났을 때, 돌아가신 분의 가족들이 집을 처분하려 했으나 오랜 시간 그 가족들과도 왕래를 하며 지냈던 친구들이 겨우 설득해서 남겨진 분이 그 집에서 계속 살 수 있었던 경우도 있었다. 또 다른 레즈비언 커플의 경우엔, 부모님들에게 커밍아웃을 못 했으나 형제들은 모두 두 사람의 관계를 알고 있어서 그 형제들이 부모님을 설득해 남은 분에게 유산 상속이 이루어지도록 했다는 사연도 들은 적이 있다. 설득의 핵심은 ‘두 사람이 그동안 어떻게 살았는지 생각해보라, 가족과 다를 바 없음을 알지 않느냐, 그러니 내쫓으면 안 된다’는 말이었다고 한다. 감동적인 사연이다. 하지만 나는 이것이 칭송받을 미담으로 남길 바라지는 않는다. 자신의 권리가 주변 사람들의 선의에 의해서 지켜지길 기대하며 평생 살고 싶은 사람은 없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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